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준 황후 (문단 편집) == 악독한 시어머니 == 위에 언급하였듯이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나가코 황후는 대노하였다. 이유는 여럿 있는데, 고준 황후는 신분제도가 당연했던 시절인 20세기 초 태생인데다 황족 출신의 황후다.[* 다른 대부분의 황후들은 [[후지와라]]의 후예인 [[고셋케]]에서 나왔다. 그런데 황족이니 그보다도 출신 신분이 훨씬 높은 셈.] 또 [[후궁]] 논란 중일 때 남편이 버티기는 했지만 처지가 대단히 곤란하다 못해 눈치를 보고 비난까지 당했던 시절에 [[아키히토|자신의 귀한 큰아들]]을 정말 힘들게 낳았기에 정말 간절히 키웠다. 신적강하 이후 결혼한 자신의 딸들은 출가해서 필연적으로 평민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전 황족이나 화족 출신 신랑감을 정해 결혼시켰지만, 대신 딸들이 결혼 전에 남편이 될 사람과 사이좋게 되도록 손을 써 준 것이다. 반면 황태자비는 장래에 나라의 국모가 되어야 할 몸인데, 정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다른 자들도 아닌 황후가 되어야 하는 자는 높은 집안에서 뽑고 싶어하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초기에는 옛 황족 가문의 딸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를 이미 황태자비로 정해 두었는데, 도중에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라는 이유 때문에 개혁파들이 뒷수작을 부려 아키히토와 쇼다 미치코가 가까워지게 하고 결혼한다 하니, 고준 황후의 입장에서는 열 받았을 것이다. 나가코 황후는 아랫동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노부코와 노부코의 언니 이츠코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 등과 똘똘 뭉쳐 반대운동을 펼쳤다. 심지어 [[우익]] 측과 연합, 쇼다 가문에 혼약 사퇴를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황실의 최고 결정권자인 남편 쇼와 덴노가 승낙하면서, 결국 아키히토 황태자는 쇼다 미치코와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미치코가 맏며느리로 시집오자, 나가코 황후는 그녀를 몹시 미워하여 '''지옥같은 [[시집살이]]를 마구 시켰다.'''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그녀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의 [[나루히토|아]][[후미히토|이]][[구로다 사야코|들]]을 친[[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배운 '아리스가와 류 [[서예|서도]]'를 미치코 황태자비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코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친정어머니와 달리, 평민 출신의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를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나가코 황후는 '''죽는 순간까지도 큰며느리를 그렇게나 미워했다고 한다.''' 그리 금슬 좋던 남편이 죽은 그 해에 사촌언니 이방자에 여동생 오타니 사토코,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까지 죽어서 충격이 컸다고 하는데, 그걸 죄다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화풀이한 걸지도.[* 이방자의 아들 [[이구(1931)|이구]]의 아내인 줄리아 멀록이 외국인이라는 것과 자식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구 황실 종친들에게 엄청 쪼이고 오만 욕을 먹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나가코 황후와는 반대로 이방자 여사는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건지 며느리를 안타까워했었다.] 자세한 시집살이 이야기들은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문서를 참조. 이유야 어쨌든 자신의 귀한 손주들을 셋이나 낳은 며느리를 약 40여 년 동안, 무려 2000년도(?!)까지 괴롭히다 죽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하기는 하다. 덕분에 [[미치코 황후]]는 실어증까지 시달려야 했다고. 여담으로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와 결혼했을 당시가 1993년인데, 미치코 황후와 달리 완전 평민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국제사법재판소장을 했던 [[외교관]] 출신에 어머니는 유학파, 오와다 마사코 본인은 외국에서 오래 지내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된 초일류 엘리트지만, 신분상으로 보면 친가는 재벌에 외가는 화족이었던 미치코 황후보다는 더 아래다.] 마사코가 초기 그리 고생한 데에는 시할머니의 영향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가코 태후의 악독한 시집살이가 둘째 손자 [[후미히토]]를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게 망쳤고[* 미치코 황태자비는 시집살이를 당하는 과정에서 온 정신을 3남매에게 다 쏟을 수 없었다. 맏이이자 후계자였던 나루히토는 아버지 아키히토의 제왕학으로 어떻게든 커버가 되었지만, 후미히토는 중요한 시기인 4살 때 여동생인 사야코 공주가 태어나버리면서 후미히토에 대한 천황 부부의 관심이 흩어져버렸다. 거기다 상당한 말썽꾸러기였던 후미히토를 부모로서 야단치려 하면 "미천한 평민 주제에 감히 귀한 황자에게 손을 대다니!!"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 정작 장손인 [[나루히토]]가 시녀들에게 상당히 엄격한 훈육을 받을땐 내버려 두었으면서. [[나루히토|후계자]]와 [[구로다 사야코|고명딸]] 사이에 끼인 차남이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한데다 할머니는 손주라고 무조건 오냐오냐 하고 [[궁내청]] 사람들은 "(후미히토)전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고 떠받드니 제대로 된 가치관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렇게 장기화되면서 지금의 아버지+남편으로서는 최악인 인품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일본 황실]]을 강타하는 거대한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후미히토의 가정 불화 등등 아주 거대한 문제로 번져 황실을 뒤 흔들고 있다. 자세한건 [[후미히토]], [[키코 비]], [[코무로 마코|마코 공주]], [[카코 공주]] 문서를 보자. 저 세상에서 작금의 사태에 얼마나 기가 막힐지는 모르겠으나 이 또한 이 사람의 자업자득이다. 남편 [[쇼와 덴노]]가 어떻게든 지키고자 한 황실을 위해 실행한 방안[* 쇼다 미치코를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키히토의 비로 맞아들인 것. 사실상 일본 황실의 입지는 쇼다 미치코로 인해 다시 굳건해졌었다.]을 이해, 수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 감정과 [[선민사상]]에 눈이 멀어 벌인 행동들이 현재 일본 황실이 뒤집어지는 나비 효과를 가져왔으니 어째보면 현 황실을 다시 풍전등화로 만들어버린 원흉이다. 본인이 황태자비 후보였을 시절 견제받으며 들었던 유언비어가 사실이 되버린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